수두는 평생 한 번, 독감 백신은 매년 — 왜 다를까
수두에 한 번 걸리면 다시는 걸리지 않습니다. 반면 독감 백신은 매년 맞아야 하고, B형 간염 백신은 수십 년이 지나도 효과가 살아 있습니다. 이 차이가 단순히 "백신이 약해서"가 아닙니다. 면역 기억이라는 시스템이 어떻게 설계되어 있는지, 그리고 병원체마다 왜 다르게 대응하는지를 이해하면 그 수수께끼가 풀립니다.
면역의 두 얼굴 — 선천 면역과 후천 면역
우리 몸의 면역은 크게 두 층으로 나뉩니다. 선천 면역은 누가 왔는지 가리지 않고 일단 막아내는 보초 역할이고, 후천 면역은 침입자를 정확히 식별해서 맞춤형 공격을 가하는 특수부대 역할입니다.
백신이 이용하는 것은 후자, 즉 후천 면역입니다. 후천 면역의 핵심은 두 가지 세포입니다. B세포와 T세포. 이 두 세포가 면역 기억의 실체입니다.
처음 병원체를 만났을 때, 적합한 면역 세포를 찾아 증식시키고 항체를 만들어 내기까지 수 일이 걸립니다. 그동안 병이 진행됩니다. 그런데 같은 병원체가 두 번째로 들어오면 이야기가 달라집니다. 미리 준비된 기억 세포가 즉시 인식해서 훨씬 빠르고 훨씬 강한 항체 반응을 일으킵니다. 그 결과 감염이 증상 없이 끝나거나 아주 가볍게 지나갑니다.
기억 B세포 — 설계도를 평생 간직하는 세포
병원체를 처음 만난 B세포는 두 갈래 길로 갈라집니다. 대부분은 형질 세포가 되어 즉각 항체를 대량 생산합니다. 지금 당장의 전쟁을 치르는 병사들입니다. 그런데 일부는 기억 B세포로 분화해, 항체 생산은 잠시 멈추고 오랫동안 몸속에 대기합니다.
기억 B세포가 특별한 이유는 단순히 오래 사는 것 때문만이 아닙니다. 이 세포들은 처음 싸울 때 거쳐온 배중심 반응(germinal center reaction) 을 통해 항원을 더 잘 인식하도록 스스로 개량됩니다. 세포 표면의 수용체가 반복적인 돌연변이와 선택을 거쳐, 최초의 B세포보다 훨씬 정확하고 강하게 달라붙는 쪽으로 정제되는 것입니다. 기억 B세포들은 수 년, 경우에 따라서는 평생 몸속에 남아 있을 수 있습니다.
기억 T세포 — 적을 인식하는 정찰병
T세포도 같은 구조를 따릅니다. 항원에 노출된 T세포는 급격히 증식해 감염 세포를 직접 제거하거나, B세포가 더 나은 항체를 만들도록 돕습니다. 그러다 감염이 끝나면 대부분의 T세포는 세포 스스로 죽는 과정(세포자살)으로 사라집니다. 하지만 약 1퍼센트 가량의 T세포는 기억 T세포로 남아 오랫동안 대기합니다.
KAIST 신의철 교수 연구팀이 국내 코로나19 회복 환자를 추적한 결과, 회복 후 10개월이 지나도 바이러스 항원과 접촉하면 즉시 증식하며 방어 기능을 발휘하는 기억 T세포가 유지됐습니다. 이 연구 결과는 2021년 6월 국제 학술지 Nature Communications에 발표됐습니다. 특히 연구팀은 줄기세포와 유사한 특성을 가진 기억 T세포가 발생한다는 사실을 세계 최초로 보고했는데, 이 세포들은 필요할 때 다시 증식해 효과적인 면역 반응을 일으킬 수 있습니다.
백신 — 싸우지 않고도 기억을 심는다
백신의 원리는 이 구조를 그대로 이용합니다. 실제 병원체 대신 가짜 적을 주입해서, 실제 감염 없이 기억 B세포와 기억 T세포를 만들어 두는 것입니다.
가짜 적의 형태는 백신 종류마다 다릅니다.
- 생백신(약독화 백신): 병원성을 약하게 만든 살아있는 바이러스를 씁니다. MMR(홍역·볼거리·풍진), 수두 백신이 대표적입니다. 실제 감염과 가장 비슷한 면역 반응을 일으켜서 보통 한두 번 접종으로 장기 면역을 형성합니다.
- 사백신(불활화 백신): 화학물질이나 열로 바이러스를 죽인 뒤 껍데기를 씁니다. 독감, 소아마비 주사 백신 등이 여기 해당합니다.
- mRNA 백신: 바이러스 표면 단백질을 만드는 설계도(mRNA)만 넣어 줍니다. 우리 세포가 직접 그 단백질을 만들고, 면역계가 이를 표적으로 학습합니다. 코로나19 mRNA 백신이 대표 사례입니다.
- 서브유닛 백신: 바이러스에서 특정 단백질 조각만 분리해 사용합니다. B형 간염 백신이 이 방식입니다.
형태는 달라도 목표는 같습니다. 실제 병에 걸리지 않고 면역 기억을 새겨 두는 것.
백신의 역사 — 소 젖 짜는 여성에서 시작된 혁명
백신이라는 개념의 출발은 1796년입니다. 영국 의사 에드워드 제너는 소 젖을 짜는 여성들이 천연두에 걸리지 않는다는 사실에 주목했습니다. 그들은 대신 가벼운 병인 우두에 걸렸다 회복된 경우가 많았습니다. 제너는 여기서 가설을 세웠고, 1796년 5월 여덟 살 소년 제임스 핍스에게 우두 고름을 접종해 천연두 면역을 확인했습니다.
'백신(vaccine)'이라는 단어 자체가 라틴어로 암소를 뜻하는 'vaccinus'에서 왔습니다. 이후 세계보건기구(WHO)는 1958년부터 천연두 근절 캠페인을 벌였고, 1980년 5월 천연두의 완전 박멸을 선언했습니다. 인류가 백신으로 완전히 없앤 첫 번째 전염병입니다. 제너의 실험이 없었다면 불가능한 일이었습니다.
면역 기억의 한계 — 독감 백신은 왜 매년 맞을까
수두 백신 한 번으로 평생 보호받는데, 독감 백신은 왜 매년 맞아야 할까요? 면역 기억은 정확히 '그 항원'에 대한 기억입니다. 독감 바이러스는 해마다 표면 단백질이 바뀌기 때문에, 작년의 기억이 올해 바이러스를 인식하지 못합니다. 새 얼굴은 새 기억을 만들어야 하는 것이죠.
반면 B형 간염 바이러스는 오랫동안 표면 형태가 크게 바뀌지 않습니다. PMC에 게재된 연구(Ma et al., 2020, Human Vaccines & Immunotherapeutics)에 따르면 B형 간염 완전 접종 후 20년에서 31년이 지나도 면역 기억과 보호 효과가 유지된다는 증거가 있습니다. 바이러스가 변하지 않으면 기억도 오래 유효한 겁니다.
면역 기억이 가르쳐 주는 것
면역 기억은 단 한 가지 교훈으로 요약됩니다. 한 번 만난 적을 잊지 않는다. 그리고 그 기억은 더 강하게, 더 빠르게 반응하도록 정제됩니다.
백신은 그 기억을 대가 없이 심어 줍니다. 실제로 병을 앓지 않아도, 몸은 이미 싸울 준비를 마칩니다. 면역 기억이 있기에 사람들은 수두에 한 번만 걸리고, 홍역이 사라지고, 천연두가 역사 속으로 사라졌습니다.
예방 접종 후 면역을 획득하기까지 보통 2주 이상이 걸립니다. 면역계가 기억 세포를 충분히 만드는 데 필요한 시간입니다. 그 2주가 지나면, 몸속에는 보이지 않는 보초가 새겨져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