통장 잔액은 그대로인데, 왜 살림은 빠듯해질까
월급을 받아 통장에 모아두면 숫자는 변하지 않는다. 그런데 어느 순간 예전에 5만 원이면 가득 찼던 장바구니가, 같은 돈으로 절반밖에 채워지지 않는다. 돈을 쓰지도 않았는데 사라진 것 같은 느낌. 이건 기분 탓이 아니다. 인플레이션이 조용히 작동하고 있기 때문이다.
인플레이션이란 무엇인가
인플레이션은 물가수준이 지속적으로 상승하면서 화폐의 가치가 하락하는 현상이다. 쉽게 말하면, 같은 금액으로 살 수 있는 물건의 양이 줄어드는 것이다. 한국은행은 이를 "모든 재화와 서비스의 평균 가격이 지속적으로 오르는 현상"으로 정의한다.
물가가 오르면 돈의 구매력(購買力) 이 떨어진다. 구매력이란 돈 한 단위로 살 수 있는 실제 재화의 양을 뜻한다. 라면 한 봉지가 500원이던 시절의 1만 원과, 800원이 된 지금의 1만 원은 숫자는 같지만 실질적으로는 다른 돈이다.
한국의 물가 상승, 얼마나 됐나
통계청 자료에 따르면, 한국의 소비자물가 상승률은 시기에 따라 크게 달랐다. 2015년에는 0.7%에 불과해 매우 안정적이었고, 2018년에도 1.5% 수준을 유지했다. 코로나19 이전까지는 대체로 1퍼센트대에서 움직였다.
하지만 2021년부터 분위기가 바뀌었다. 2021년 2.5%로 오르더니, 2022년에는 5.1%를 기록하며 1998년 외환위기(7.5%) 이후 24년 만에 최고치를 찍었다. 그해 석유류는 22.2%, 전기·가스·수도는 12.6%, 가공식품은 7.8%가 올랐다. 국제 원자재 가격의 급등이 국내 물가 전반으로 번진 결과였다. 2025년에는 2.1%로 안정을 되찾았지만, 한 번 올라간 가격은 내려오지 않았다.
통장에 넣어두면 손해인 구간이 있다
여기서 핵심 개념이 등장한다. 바로 실질금리다.
실질금리 = 명목금리(예금 이자율) − 물가상승률
2022년 한국의 예금은행 저축성 수신금리는 연 약 2.77% 수준이었다. 반면 물가상승률은 5.1%였다. 계산하면 실질금리는 약 마이너스 2.3%다. 즉, 은행에 돈을 넣어두면 이자를 받아도 물가 상승분에 미치지 못해 실질 구매력이 오히려 줄어드는 상황이 벌어진 것이다. 이 마이너스 실질금리 현상은 2021~2022년 연속으로 이어지며, 코로나19 이후 이례적으로 큰 폭의 마이너스를 기록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숫자로 보면 더 명확하다
연 3% 인플레이션이 지속된다고 가정하면, 오늘의 1,000만 원은 10년 후에는 약 744만 원의 실질 가치만 남는다. 20년이 지나면 약 554만 원 수준으로 떨어진다. 통장 숫자는 1,000만 원으로 그대로지만, 그 돈으로 살 수 있는 물건의 양이 절반 가까이 줄어드는 것이다.
현재 월 생활비가 300만 원인 사람이라면, 연 3% 인플레이션이 20년간 이어질 경우 같은 생활 수준을 유지하려면 월 542만 원이 필요해진다. 생활수준이 올라간 게 아니라, 물가가 오른 것뿐인데 돈이 더 나가는 구조다.
한국은행은 이처럼 인플레이션이 부르는 부작용 중 첫째를 화폐가치 하락과 구매력 감소로 꼽는다. 저축의 실제 가치가 줄어들고, 특히 고정 수입(월급·연금)에 의존하는 사람의 생활이 더 어려워진다는 것이다.
인플레이션이 부의 격차를 벌리는 이유
인플레이션은 모두에게 공평하게 작용하지 않는다. 현금이나 예금만 보유한 사람은 구매력이 조용히 줄어드는 반면, 부동산·귀금속 등 실물자산을 가진 사람은 자산 가격도 함께 오르는 경향이 있기 때문이다. 물가가 오를 때 현금으로만 자산을 쌓은 사람과 실물자산을 섞어둔 사람의 실질 재산 격차는 시간이 갈수록 벌어지게 된다.
한국은행이 이 문제를 설명하는 방식은 단순하다. "인플레이션이 예상되면 금융상품보다 부동산이나 귀금속을 선호하게 되어, 이들 자산 소유자에게는 유리하지만 월급 생활자의 상대적 빈곤이 심화된다."
한국은행이 2%를 목표로 삼는 이유
그렇다면 물가는 0%가 가장 좋을까? 반드시 그렇지는 않다. 물가가 전혀 오르지 않거나 내려가면 사람들이 '지금 사지 말고 더 싸질 때 사자'는 심리로 소비를 미루고, 경기가 침체된다. 이를 디플레이션이라고 한다.
그래서 한국은행은 연 2% 수준을 물가안정목표로 설정해 운용한다. 너무 낮지도, 너무 높지도 않은 완만한 물가 상승이 경제 성장에 적합하다는 판단이다. 목표는 2%지만, 현실의 물가는 그 위를 달릴 때가 많다.
지금 내가 할 수 있는 한 가지
인플레이션에 대응하는 방법은 복잡하지 않다. 핵심은 내 돈이 인플레이션 속도보다 더 빠르게 불어날 방법을 찾는 것이다.
첫 번째 단계는 간단하다. 지금 내 예금 이자율이 물가상승률보다 높은지 낮은지를 확인하는 것. 이자율이 물가보다 낮다면, 통장의 숫자는 그대로여도 실질 구매력은 매년 줄어들고 있다는 뜻이다.
이걸 모르는 것과 아는 것은 재테크의 시작점이 다르다. 인플레이션은 요란하게 돈을 빼앗지 않는다. 그저 조용히, 해마다 조금씩, 통장에서 구매력을 지워나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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