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밤의 괴담 한 조각

마을 전체가 사라지고 'CROATOAN' 한 단어만 남았다

보급선이 돌아왔을 때, 섬에는 사람 대신 나무에 새겨진 한 단어만 남아 있었다.

보급선이 돌아왔을 때

1590년 8월 18일, 존 화이트는 3년 만에 로어노크 섬으로 돌아왔다. 그는 이 섬에 세운 영국 식민지의 총독이었고, 보급품을 구하러 잠시 영국에 다녀온 것뿐이었다. 멀리서 연기 한 줄기가 피어오르는 걸 보고 그는 희망을 품었다. 누군가 자신을 기다리고 있다는 신호라 여겼다. 하지만 섬에 발을 디딘 그가 마주한 건 사람이 아니라, 모래 위에 찍힌 갓 생긴 발자국과 텅 빈 정적이었다.

화이트가 떠나기 전, 이 섬에는 백 명이 넘는 사람이 살고 있었다. 남자와 여자, 그리고 아이들. 기록에 따라 112명에서 121명까지 조금씩 다르지만, 분명한 건 한 마을이 통째로 있었다는 사실이다. 그중에는 화이트의 딸 엘리너와, 그가 떠나기 직전 태어난 손녀 버지니아 데어도 있었다. 버지니아는 아메리카에서 영국인 부모에게 태어난 최초의 아이로 기록된다. 화이트가 섬으로 돌아온 그날은 공교롭게도 그 손녀의 세 번째 생일이었다.

사라진 마을, 그리고 한 단어

마을은 흔적이 지워져 있었다. 집들은 부서진 게 아니라 가지런히 해체돼 있었다. 누군가 급습해 약탈한 흔적도, 싸움의 자국도, 시신도, 무덤도 없었다. 대신 그 자리에는 통나무로 짜 올린 울타리 같은 구조물이 서 있었다. 그리고 그 울타리의 기둥 하나에, 글자가 깊게 새겨져 있었다. CROATOAN. 근처 나무 한 그루에는 그 일부인 듯한 CRO 세 글자가 따로 새겨져 있었다.

'크로아토안'은 비명이 아니었다

이 단어가 오싹한 건, 그것이 다급한 비명이 아니라 차분한 이정표였기 때문이다. 화이트는 떠나기 전 정착민들과 약속을 해 두었다. 만약 어딘가로 옮겨 가게 되면 그곳의 이름을 새겨 두고, 강제로 끌려가는 위급한 상황이라면 그 위에 십자 표시를 덧붙이기로. 그런데 기둥에도 나무에도 십자가는 없었다. 즉 이 사람들은 쫓기듯 끌려간 게 아니라, 스스로 차분히 어딘가로 떠났다는 뜻이었다. 크로아토안은 80킬로미터쯤 남쪽에 있는 섬이자, 그곳에 살던 우호적인 원주민 부족의 이름이기도 했다. 단서는 그렇게 명확해 보였다.

폭풍이 끊어버린 마지막 끈

화이트는 당장 크로아토안 섬으로 배를 돌리려 했다. 손녀가 그곳에 있을지 모른다는 희망 하나로. 그러나 바다가 그를 막아섰다. 거센 폭풍이 몰아쳤고, 닻줄이 끊어졌으며, 배는 더 머물 수 없는 상태가 되었다. 결국 화이트는 가족을 코앞에 두고 영국으로 돌아갈 수밖에 없었다. 그는 끝내 다시 대서양을 건너지 못했고, 딸도 손녀도 두 번 다시 보지 못한 채 눈을 감았다. 그날의 폭풍은 한 가족이 다시 만날 마지막 가능성을 끊어 버린 셈이다.

400년 뒤, 땅이 입을 열다

수백 년 동안 사람들은 온갖 상상을 보탰다. 원주민에게 몰살당했다, 배를 타고 영국으로 돌아가려다 바다에서 사라졌다, 심지어 초자연적으로 증발했다는 이야기까지. 하지만 시신도 난파 잔해도 발견된 적이 없다. 오늘날 학자들이 가장 유력하게 보는 답은 의외로 담담하다. 보급이 끊기고 일부 부족과 관계가 나빠지자, 정착민들이 무리를 나눠 인근 원주민 공동체로 옮겨 가 함께 살았다는 것이다. 실제로 해터러스 섬과 내륙의 발굴 현장에서 16세기 말 영국식 도자기와 유물이 원주민 유물과 함께 나왔다. 화이트가 직접 그린 옛 지도에서는, 덧대어 가려져 있던 자리에서 내륙의 요새 표시가 드러나기도 했다.

한 줄 정리

로어노크의 사람들은 허공으로 사라진 게 아니라, 어쩌면 살기 위해 조용히 걸어 나갔을 뿐인지도 모른다. 다만 그 한 단어 너머로 그들이 정확히 어디로, 어떻게 흩어졌는지는 400년이 지난 지금도 누구도 끝까지 답하지 못한다.

출처

#로어노크#미제사건#식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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