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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정가 10만 원 → 5만 원'에 지갑이 열릴까

같은 5만 원짜리인데, 정가 표시가 있느냐 없느냐만으로 사람들의 지불 의향이 크게 달라진다.

같은 5만 원, 다른 느낌

백화점 세일 코너에서 이런 태그를 본 적 있을 것이다.

10만 원5만 원

그 옆 다른 진열대에는 정가 5만 원짜리 같은 품질의 물건이 놓여 있다. 그런데 손이 먼저 가는 건 취소선이 그어진 쪽이다. 왜일까?

가격이 같은데 우리는 왜 한쪽에서만 '득템'의 기쁨을 느낄까. 이 물음의 답은 행동경제학의 핵심 개념인 닻내림 효과(Anchoring Effect)에 있다.


닻을 내리면 판단이 묶인다

1974년, 인지심리학자 아모스 트버스키(Amos Tversky)와 대니얼 카너먼(Daniel Kahneman)은 실험 참가자들에게 이상한 질문을 던졌다. 먼저 앞에서 돌린 룰렛 바퀴가 특정 숫자에 멈추는 것을 보여 준 뒤, "UN 회원국 중 아프리카 국가는 몇 퍼센트일까요?"라고 물었다. 룰렛은 조작되어 있어 10이나 65에만 멈췄다.

결과는 놀라웠다. 숫자 10을 본 그룹은 평균 25퍼센트라고 답했고, 65를 본 그룹은 평균 45퍼센트라고 답했다. 룰렛 숫자와 아프리카 국가 비율은 아무런 논리적 관련이 없다. 그런데도 아무 의미 없는 첫 숫자가 사람들의 추정치를 완전히 다른 방향으로 끌어당겼다. 이 연구는 과학 저널 사이언스에 "불확실성 아래의 판단: 경험적 추론과 편향"이라는 제목으로 실렸으며, 이후 행동경제학의 출발점이 된 논문으로 꼽힌다.

이것이 닻내림 효과다. 배가 닻을 내리면 닻줄 길이만큼만 움직이듯, 사람의 판단도 처음 접한 숫자 주변을 맴돈다. 그 숫자가 합리적이든 임의적이든 관계없이.


MIT 실험: 사회보장번호가 가격이 된다면

2003년, MIT의 댄 애리얼리(Dan Ariely) 교수와 조지 로웬스타인(George Loewenstein), 드레이즌 프렐렉(Drazen Prelec) 교수는 더 파격적인 실험을 설계했다. 결과는 2003년 계간 경제학 저널(Quarterly Journal of Economics)에 발표됐고, 이후 애리얼리의 저서 『상식 밖의 경제학(Predictably Irrational)』(2008)을 통해 널리 알려졌다.

학생들에게 와인 한 병, 초콜릿, 무선 트랙볼 등 여러 물건을 보여 주며 경매를 진행했다. 그런데 입찰 전에 학생들은 자신의 사회보장번호 마지막 두 자리를 써야 했다. 번호가 상위 20퍼센트인 학생(80에서 99 구간)과 하위 20퍼센트인 학생(01에서 20 구간) 사이에서 입찰가는 얼마나 차이났을까?

결과는 충격적이었다. 번호가 높은 그룹은 낮은 그룹보다 216퍼센트에서 346퍼센트 높은 금액을 써냈다(상위 20% 대 하위 20% 비교 기준, 품목별 편차). 무선 트랙볼만 놓고 보면, 번호가 낮은 그룹의 평균 입찰가는 약 9달러, 높은 그룹은 약 26달러였다. 세 배에 가까운 차이가 사회보장번호라는 순전히 임의적인 숫자 하나로 벌어진 것이다.

애리얼리는 이를 '임의적 일관성(Arbitrary Coherence)'이라 불렀다. 처음 접한 숫자가 아무리 엉터리여도, 일단 그것이 기준점으로 자리 잡으면 이후 판단 전체가 그 기준을 중심으로 일관성 있게 작동한다는 뜻이다.


유통업체는 이미 알고 있었다

이 심리를 가장 잘 이해하고 활용하는 곳이 바로 유통업계다.

미국의 소비자 조사 기관 컨슈머스 체크북(Consumers' Checkbook)은 2022년에 25개 대형 유통사의 가격을 33주간 추적 조사했다. 결과는 충격적이었다. 8개 회사에서 절반 이상의 상품이 "매주 또는 거의 매주" 할인가로 팔리고 있었다. 한 유명 스포츠용품 체인은 전체 상품의 98퍼센트가 상시 '세일' 상태였다. 정가가 실질적인 닻으로 기능하는 게 아니라, 애초부터 닻으로 쓰기 위해 높게 책정된 가격인 셈이다.

같은 원리가 고급 레스토랑 메뉴판에도 적용된다. 가장 비싼 요리를 메뉴 상단에 배치하는 관행이 그것이다. 5만 원짜리 스테이크를 먼저 본 손님은 3만 원짜리 파스타를 "합리적인 선택"으로 느낀다. 반대로 가장 저렴한 메뉴부터 본다면 같은 파스타가 비싸 보일 수 있다.


닻내림이 작동하는 두 가지 경로

심리학자들은 닻내림 효과가 두 가지 경로로 판단에 영향을 미친다고 설명한다.

첫 번째는 '조정 부족(Insufficient Adjustment)'이다. 사람들은 닻을 기준으로 출발해 조정을 시도하지만, 적정 값을 찾았다고 느끼는 지점에서 조정을 멈춘다. 문제는 그 지점이 항상 닻에 지나치게 가깝다는 것이다. 닻에서 멀어질수록 불확실감이 커지기 때문에 심리적으로 멈추고 싶은 지점이 이른 것이다.

두 번째는 '선택적 접근성(Selective Accessibility)'이다. 닻이 되는 숫자를 보는 순간, 그 숫자와 어울리는 정보들이 뇌에서 더 쉽게 떠오른다. '10만 원'이라는 닻을 본 뒤 상품을 평가하면, 그 가격을 정당화할 만한 특징들이 무의식중에 더 잘 검색된다. 반대로 닻이 없다면 같은 특징을 덜 주목했을 것이다.


내 지갑을 지키는 단 하나의 습관

닻내림 효과는 경고를 들어도 쉽게 사라지지 않는다고 알려져 있다. 자신이 편향에 취약하다는 것을 알면서도 여전히 영향을 받는다는 실험 결과들이 있다.

그러나 한 가지 실용적인 방법이 있다. '정가'를 보기 전에 스스로 묻는 것이다.

"이 물건이 내게 실제로 얼마의 가치가 있을까?"

취소선이 그어진 숫자를 보기 전, 내가 직접 가격을 추정해 보는 것이다. 그러면 '10만 원 → 5만 원'이라는 닻이 아닌, 나 자신의 판단이 기준점이 된다.

5만 원이 합리적이라면 사면 된다. 하지만 그 기준은 판매자가 내린 닻이 아니라, 내가 직접 내린 닻이어야 한다.


한 줄 정리

닻내림 효과: 처음 본 숫자가 이후의 판단을 당긴다. 정가는 가격이 아니라, 판매자가 내 뇌에 심어 놓은 닻이다.

출처

#재테크#행동경제학#소비심리#가격심리#닻내림효과#앵커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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